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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시기 홍콩

Hong Kong during the British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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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은 19세기 청나라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청국이 패함에 따라 맺어진 조약들로 영국에 할양되어 1842년부터 1997년까지 156년간의 영국의 식민 지배시기를 거쳤다. 홍콩에게 주어진 역할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이자 자유무역항으로 영국의 아시아 침략을 위한 식민지이자 발판이었다. 홍콩은 작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영국의 식민지 기간 동안 자유무역항이자 금융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 홍콩은 진나라 시황제 시절부터 중국에 편입되었지만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아편전쟁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청의 패배로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홍콩 섬이 영국에 영구 할양되었다. 제 2차 아편전쟁으로 또 다시 영국에 패한 청나라는 1860년에 영국과 북경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영국은 구룡반도의 일부와 스톤 커터 섬을 청나라로부터 영구 할양받게 된다. 이후 영국은 또 다시 중국을 압박하여 1898년 신계 및 235개 부속도서를 99년 조차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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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 대전 시기였던 1941년 12월 일본은 홍콩을 침략하였고, 홍콩은 1941년 12월~1945년 8월까지 3년 8개월간의 일본의 점령 시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일본의 점령 시기에 홍콩인들은 강제 배급에 따른 식량 부족 문제로 비참하고 곤궁한 상황에 처하였다. 일본은 군표로 화폐를 대체하였는데, 이 군표의 남발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전쟁 이전의 홍콩의 160만이었던 인구는 1945년에는 절반 미만인 60만으로 줄었다.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전쟁이 종식되면서 홍콩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국으로 복귀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자 상하이와 광저우의 많은 회사들이 홍콩으로 그들의 본사를 이전하였으며, 이것은 60년대 홍콩 제조업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다수의 홍콩인들 또한 중국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 나왔다. 이 시기의 홍콩은 외부 세계와 중국 본토를 연결 짓는 유일한 교두보였다. 홍콩은 중국과 서양이 복잡하게 얽히는 곳으로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는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확보했으며,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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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정부는 홍콩 식민 통치에 있어 식민 통치의 전형적인 행태를 유지하였다. 절대 권력을 지닌 제한되지 않는 임기의 총독에 의한 식민통치를 실시하였고 홍콩에서 보장되는 홍콩인의 시민적 자유는 사실상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었을 뿐이었다. 총독은 홍콩인이 아닌 영국인에게만 주어졌으며 홍콩인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 영국 여왕의 임명직이었다. 총독은 독점적 권력을 누리며 행정, 입법권, 부분적 사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한 직권을 행사하였다. 이렇듯 영국에 의해 임명된 총독에게는 절대 권력이 부여되어 있었고, 홍콩인의 정치적 참여는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 홍콩은 영국의 자유항으로 자리매김하여 국제도시의 위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이자 홍콩의 독자적인 의미를 확보하여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당시 홍콩 반환이라는 정치적 의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홍콩인들에게는 정치나 정체성의 문제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홍콩 반환 이전의 홍콩인들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 또한 뚜렷하지 않았다.

영국과 북경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구룡반도의 일부와 스톤 커터 섬을 청나라로부터 영구 할양받게 된다. 이후 영국은 또 다시 중국을 압박하여 1898년 신계 및 235개 부속도서를 99년 조차하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되었다. 다수의 중국인들 또한 중국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 나왔다. 이 시기의 홍콩은 외부 세계와 중국 본토를 연결 짓는 유일한 교두보였다. 홍콩은 중국과 서양이 복잡하게 얽히는 곳으로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는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확보했으며,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게는 정치나 정체성의 문제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홍콩 반환 이전의 홍콩인들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 또한 뚜렷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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