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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패튼 총독 시기 민주화 진전

The Advancement of Democracy in the Age of Chris Pa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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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말이 되자 홍콩의 영국계 자본들은 1997년으로 합의되었던 신계의 조차만기일이 야기하는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홍콩 문제의 해결을 홍콩 정부와 영국 정부에 강력히 촉구하였고 이는 양국 접촉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홍콩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계 지역의 조차 연장을 중국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홍콩 전 지역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1982년 8월 영국의 대처 수상은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과 협상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 영국은 홍콩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되 통치권은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며 협상의 논의를 시작하였으나 중국은 주권의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중국은 과거 청국이 서구 열강들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에 대해 반대하며, 주권국가로서의 자국의 영토인 홍콩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있던 반면 영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자유 무역항이자 금융 도시이며, 군사적 전략 기지인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넘겨주는 것이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 그러나 협상카드가 미미했던 영국은 주권 문제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고 1997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하는 홍콩의 주권 반환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 과정 중에 중국은 홍콩에 대해 향후 50년 동안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하게 하는 일국양제 방안을 제시한다.

의 자국의 영토인 홍콩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이던 반면 영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자유 무역항이자 금융 도시이며, 군사적 전략 기지인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넘겨주는 것이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 그러나 협상카드가 미미했던 영국은 주권 문제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고 1997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하는 홍콩의 주권 반환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 과정 중에 중국은 홍콩에 대해 향후 50년 동안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하게 하는 일국양제 방안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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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9월 26일 양국은 중영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항인치항', 즉 '홍콩은 홍콩 사람이 다스린다'는 약속과 1997년 홍콩의 반환 후 50년간 홍콩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50년 불변의 원칙', 고도의 자치권에 의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생활양식을 인정한다는 '일국양제'의 삼 원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배제로 자신에 대한 결정 과정인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중영공동선언 8년 뒤인 1992년 부임한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총독으로 부임한 지 3개월만에시정연설에서 민주화 정치개혁 방안을 발표하였다. 1995년 홍콩입법회 선거를 강행하는 등의 패튼의 정치개혁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왔다. 중국은 일국양제가 1984년 공동 성명 시기의 기존 홍콩 사회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 이후 실시된 홍콩인의 중국과의 통합과 귀속을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민주적 정치 개혁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비록 중국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지만 홍콩인들에게 영국에 의한 정치 개혁 시도는 정치적 자유, 즉 정치적 권리와 민주화를 갈망하는 요구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홍콩인들에게 영국의 정치 개혁 시도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비판과 저지는 민주=영국의 통치=반환 전의 홍콩/비민주=중국의 통치=반환 후의 홍콩이라는 대립 구도의 인상을 강렬히 남기게 되었다. 크리스 패튼 총독 시기 대립 구도에서 부각된 '민주', '자유', '법치' 등의 가치와 인식이 홍콩인들에게 대두된 것이다. 또한 중국은 89년 천안문 사태와 맞물려 홍콩의 타자로 설정되어 기존의 영국 식민 정부보다 훨씬 비민주적이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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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7월 1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인수인계되었다. 이로써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었고, 홍콩특별행정구가 탄생하였다. 홍콩에는 중국으로부터 약속 받은 향후 50년간 고도의 자치권에 의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생활양식을 인정한다는 '일국양제'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1997년 주권반환 이후 홍콩은 영국의 간섭이 완전히 배제되어 중국의 통치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과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서구의 침탈 속에 빼앗겼던 홍콩의 주권 및 영토를 회수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적 당위였으며, 민족적 상처에 대한 치유이자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영국식 사회시스템에 오래 길들여진 홍콩인에게는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으로 회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중산층의 홍콩인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민을 선호하였는데 이 시기 홍콩 인구 약 630명 중 65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립 구도에서 부각된 '민주', '자유', '법치' 등의 가치와 인식이 홍콩인들에게 대두된 것이다. 또한 중국은 89년 천안문 사태와 맞물려 홍콩의 타자로 설정되어 기존의 영국 식민 정부보다 훨씬 비민주적이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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